2019년 11월 23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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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채 박사의 신 해양실크로드] 말레이반도의 해양 거점 ‘페낭’ (2)
우리나라 천주교와 깊은 인연 맺고 있는 ‘페낭 신학교’

  • 입력날짜 : 2018. 12.11. 18:14
문병채 (주) 국토정보기술단 단장 출처: http://m.cafe.daum.net(페낭 신학교 해외성지순례후원회, 김창환 글)
페낭은 말레이반도 서북부에 있는 작은 섬이다. 예부터 ‘동양의 진주’라고도 불렀다. 참 아름다운 섬이다.

이곳 페낭 신학교에서 130년 전 조선인 신학생들의 흑백사진 2점이 나왔다. 최승룡 신부님이 이곳 신학교 자료실에서 찾아낸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발굴되지 않은 자료가 많다니 기대가 크다.

‘동양의 진주’로 알려진 말라카해협의 아름다운 섬 ‘페낭’, 그 섬의 의미가 다시 새겨진다.

▶ 역사가 집적된 구 시가지 ‘조지타운’

페낭은 ‘동양의 진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말레이시아 섬이다. 1786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설치된 후 ‘인도-중국 항로의 최대 기항지’로 자리 잡았다. 이후 중국·인도·인도네시아·미얀마 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주석과 고무의 최대 수출기지 역할을 이를 더욱 뒷받침했다.

페낭의 중심지는 구시가지인 ‘조지타운’이다.

여기에는 차이나타운, 인도인 촌, 아랍인 촌, 유럽인 촌 등 여러 구역이 있으나, 차이나타운이 중심을 형성하고 있다. 차이나타운은 특히 옛날 중국 남부에서 건너온 5대 가문이 각기 자기 영역을 가지고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 각 가문의 모임장소, 즉 콩시·콴인텡사원 등은 그들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동쪽 해변지역은 교회·성당·시티 홀·콘월리스 요새 등 영국 식민지 시절에 세워진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때문에 페낭은 도시 자체가 하나의 역사유적이다. 현재는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이곳저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벽화가 유명한 도시답다. 민속을 표현한 것들이 많은데 생동감이 넘친다.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에 열중이다.

지나가는 주민이 사진 찍는 포인트를 알려주기도 한다. 재미있는 골목투어다. 역사성 있는 골목에 관광객을 잡는 수단이다. 오래된 건물 사이사이에 박물관처럼 골동품과 수공품을 내놓고 판다. 빈티지하지만, 그게 좋다.
당시 페낭신학교가 있었던 곳의 거리. 신학교는 외곽으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는 다른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거리의 건물들은 거의 다 옛날 그대로다.

▶ 순교한 김대건 신부 유해 보관

현재 ‘페낭 신학교’는 섬의 북쪽 해안(탄중 붕가 지역의 잘란센가이 골목)에 있었다. 1984년에 이곳으로 이사해 온 것이다.

원래 조지타운의 ‘풀라우티쿠스(Pulau Tikus)’있었다.

페낭 신학교는 1665년 샴(태국)의 수도 아유티아에 세운 ‘천사들의 신학교’에서 시작된다. 이후 태국 내전으로 인해 1765년 코친 차이나의 혼다트로 옮겨졌다가, 1770년 인도의 폰디체리로 다시 옮겨졌고, 1783년에는 일시 폐교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25년 만인 1808년에 다시 이곳 페낭에 세워졌다.

조선, 중국, 베트남, 일본, 버마, 태국, 말라카이 등지의 동양 10여 개국에서 온 신학생들이 사제수업을 받았던 학교였다.

풀라우티쿠스의 신학교 자리에는 지금은 다른 빌딩(거니플라자)이 들어서 있었다.

옛 모습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어 아쉬웠다. 회랑식 2층 흰색 건물, 아치형 창문들, 넓은 운동장과 야자수 나무들…, 낡은 흑백사진에 담겨진 모습이다.

신학교의 뒤쪽은 해안과 접해 있다. 푸른 바다와 열대 수목이 어우러져 아름답다. 눈물로 거닐었을 조지타운 중심가! 화려하게 꾸민 꽃마차 ‘트라이쇼’가 번잡하게 다닌다.

그 때도 다녔을까! 십대의 어린 나이로 이곳에 온 한국 신학생들도 탓을 것으로 여기니…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아시아 선교의 현장’이다.

한국 천주교를 개척한 사제들의 눈물과 고통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들의 영성과 배움의 현장을 마음속에 담아 본다. 이 순간이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진다. 뒤로 보이는 늦은 저녁 바다가 어둠이 짙게 물들고 있다.

탄중 붕가 지역에 있는 현재의 페낭 신학교를 찾아 갔다. 200년 된 페낭 신학교! 우리나라의 천주교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아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1855-1884년 사이에 24명의 한국 신학생이 유학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인천→나가사끼→홍콩→싱가포르→페낭에 이르는 뱃길을 따랐다. 서울에서 무려 50여일이 걸린 길이었다.

페낭 신학교에는 조선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앵베르 주교·모방·샤스탕 신부·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보관돼 있다.

특히 이곳 신학교의 교수를 역임한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 신부는 동상까지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 신학생뿐만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페낭 신학교와 관계가 있는 곳임을 알았다. 제1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신부로 재직했고,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1821년 이곳에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으며, 샤스탕 신부는 1828년부터 4년 동안 이곳에서 교수로 근무했다고 한다.

특히,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이후, 김 신부의 뼈는 잘게 쪼개져 무려 350여곳이 넘는 성당에 모셔졌다고 한다.

그가 유학했던 마카오의 ‘성 안토니오 성당’과 함께 이곳에도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이국의 땅에서 성인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엄숙함과 환희가 들었다.

천주교에서 ‘순교자의 피’로 성장해 온 가톨릭교회는 4세기 이후 순교자의 육체는 ‘성령의 궁전(그리스도의 지체)’로 여겨온다고 한다. 그것은 성당들이 순교자의 뼈 한 조각이라도 모시고 있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함께한 가이드가 말해준다.

▶ 페낭 신학교에 유학했던 한국인 신학생

이곳에서 찾아진 ‘우도 신부와 조선인 신학생들’ 사진은 1888-1890년 사이에 촬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4명의 조선인 신학생이 찍혔는데 모두 중국 옷차림에 맨발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사진 속의 3명은 가르마를 탄 머리를 하고 있다. 사진에는 어린 아동부터 제법 나이가 든 청년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당시 10-29살 연령대가 선발됐다고 전해온다.

조선 신학생들이 첫 발을 내디딘 것은 1855년 10월이었다. 이 만돌(22세), 김 사도(19세), 임 빈첸시오(17세) 등 셋이었다. 지금부터 약 160년 전이다.

당시 이들은 전북 고군산도 앞에서 어둠을 헤치고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 중국 정크선에 태워져 한 달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그들은 1년 반 동안 김대건 신부가 유학했던 성당에서 라틴어와 기초 지식을 배운 후, 1855년 더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페낭 신학교에 보내졌다.

1882-1884년에는 몇 차례에 걸쳐 21명이 선발돼 제2기 신학생으로 이곳에 왔고, 후에 이 중 12명은 한국으로 돌아와 신부가 됐다고 한다.

이곳에 도착한 한국 신학생들은 인종과 풍습이 다른 10여 개국의 유학생들과 함께 공부했다.

이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 교우들. 방향도 알 수 없는 기나긴 항해, 음식과 배 멀미로 인한 고통에 힘들어 했을 것이다.

또한 기후와 풍토가 달라 풍토병으로 심한 고생을 했고 심지어 병사(病死)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갓 열 살을 넘는 이도 있었다. 그들에겐 이 섬이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풍습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검은 피부의 동료들, 아름답고 신기함 보다는 두려움이 더 컷을 것이다.

최승룡 신부님이 찾아낸 사진에 그들의 일부 모습이 보이고 있다. 이곳 신학교에는 발굴되고 조사되지 않은 많은 자료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인 신학생들과 신부들에 관한 성적표와 교수평가서 등 다양한 자료가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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