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4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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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명품마을을 찾아서] (2) 여수 석천마을
최초로 충무공 모신 사당 충민사…‘충효의 고장’
임진왜란 초기 위태로운 나라 지킨 보루
1601년 통제사 이시언이 왕명 받아 세워
불교사찰과 유교사당 나란히 자리 ‘이채’
어머니 향한 이순신 장군 효심 이어받아
주민들 매년 ‘효사랑 한마음 잔치’ 개최
마을 어르신들 모시고 ‘효도관광’도 눈길

  • 입력날짜 : 2019. 08.28. 19:14
충민사
여수시 만덕동에 자리한 석천마을. 만덕동은 만흥동과 덕충동의 이름을 딴 여수시의 행정동이다. 덕충동은 원래 마래산 아래 둔덕이 되므로 떡더굴 또는 덕대라 했는데, 1914년 일제의 행정개편에 의해 와동과 합쳐 덕대와 이곳에 있는 충민사의 이름을 따서 덕충리라고 했다. 그리고 또 구전에 의하면 조선중기 때 부터 약 50여호의 조그마한 마을이 형성돼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덕충천을 중심으로 덕충천 동편으로는 덕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해 덕대마을로, 덕충천 북쪽에는 석천(돌샘)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기왓장을 굽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해 석동마을로 불리다가 해방 후엔 충민사 부근에서 여수중학교 뒷편까지 석천동이라 불렀다. 그 후 덕대마을의 덕자를 따고 이순신 충무공의 유적지가 있다 해 충자를 붙여 덕충이라 불리고 있다고 한다.

따뜻하고 행복한 석천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위두번째부터 충민사 정화 사적비, 충민사 유물전시관, 석천사

◇충무공 숨결 살아 숨 쉬는 곳

여수하면 이순신. 이순신하면 여수다. 여수밤바다가 뜨기 전부터 여수는 이순신의 고장으로 유명했다. 이에 걸맞게 여수 석천마을의 자랑거리가 있다. 바로 충민사(忠愍祠). 이곳은 이순신 장군을 최초로 모신 사당이다.

1601년(선조 34)에 영의정 이항복이 발의한 뒤, 왕명을 받은 통제사 이시언이 충무공 이순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사당이다.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나 통영의 충렬사(忠烈祠)보다 훨씬 앞서 세워졌다.

사당은 아담하고 작은 공간에 남쪽을 향해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에는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다. 서남쪽 앞뜰에는 옛 건물의 주춧돌이 보관돼 있고, 바로 서쪽에는 새로 세운 비가 놓여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19년 일제에 의해 없어졌다. 1971년부터 여수의 유림들이 ‘정화 5개년사업’을 펼쳐 다시 짓기 시작해 1978년에 정비가 완료돼 오늘에 이른다. 현재 사적 제381호로 지정된 사당은 여수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만약에 호남이 없었다면 어찌 이 국가가 있을 수 있으리까?’ 이 충무공은 1593년 7월 16일 진을 여수에서 한산도로 옮긴 다음날 현덕승에게 올린 답서에 이렇게 적었다. 여수는 임란 초기에 위태로웠던 나라를 지킨 보루였다.

◇유교사당을 스님이 관리한다?

충민사 바로 옆에는 석천사가 자리잡고 있다. 유교사당과 불교사찰이 나란히 붙어 있는 이 두 곳은 한 몸처럼 인식돼 왔다. 충민사는 향교 교리로서 의병으로 참전했던 박대복으로부터 유래됐다. 박대복은 이순신 휘하에서 7년 동안이나 종군했던 의병이었다. 그는 전사한 충무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이 매일같이 오르내리며 마셨던 석천수(현재 충민사 뒤편)를 찾아가 두어 칸 사당을 세운 것이 충민사의 시작이었다. 의승수군대장으로 참전해 공을 세운 옥형스님은 이순신이 전사하자 그의 전사를 막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충민사 곁에 작은 정사(석천사)를 짓고 그곳에 들어갔다. 그는 80이 넘도록 죽는 날까지 이 정사에서 나오지 않았다. 충민사는 이들의 정성에 힘입어 이 충무공 사후 3년 되던 해인 1601년(선조 34년) 왕명을 받아 지어졌으며, 사액을 받았다. 이후 충민사는 좌수영에서 파견된 수호승장 스님이 관리를 해왔다.

어떻게 유교사당을 스님이 관리하게 됐을까? 그 내력을 살펴보니, 승군조직은 1895년 고종이 좌수영을 폐지할 때까지 유지됐다는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임란이 일어났던 1592년 여수 흥국사에 승군본부가 조직되고, 1593년 승군 300명이 웅천전투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순신이 전사하자 호남에 사는 승려들이 이공을 위해 재를 올리는데 사찰마다 올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1599년 불교계에서는 자운스님(화엄사 승려로 추정)이 주도해 선조가 내려준 백미 600석으로 노량에서 수륙재(영혼천도재)를 열고 음식물을 성대히 차려 충민사에 제사까지 지냈다. 수륙재에는 임금이 시주좌가 되고, 수군대장이 참여하는 국가 행사로서 전쟁 이후 민심을 달래는데 큰 역할을 해왔다. 수륙재에는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 여수 흥국사, 충무 미래사, 부산 범어사가 주축이 돼 참여했다. 승군조직은 임란 이후에도 좌수영군 소속으로 300명 규모로 300년 동안 유지해오다 1895년 갑오개혁 군제개편에 의해 좌수영과 수륙재가 폐지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석천마을 전경

◇충무공의 효심 깃든 석천마을

‘촛불을 밝히고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 병드신 팔순 어머니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을미년 1월 1일)의 한 대목이다.

충무공이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기까지는 장군의 모친 초계 변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충무공의 지극한 효심만큼이나 변씨의 자애로운 가르침은 어린 시절부터 충무공을 바른 길로 인도했다.

충무공은 고심 끝에 어머니를 전라좌수영 가까운 마을에 모셔두고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자주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충무공의 지극한 효심을 이어받은 석천마을 주민들은 매년 효사랑 한마음 잔치를 연다. 윷놀이, 노래자랑 등 재미난 행사가 펼쳐진다. 맛과 정이 넘치는 먹을거리도 마련해 넉넉한 나눔의 시간을 가진다. 석천마을 효사랑 한마음 잔치는 경로효친사상을 실천하고자 매년 열고 있는 행사로 올해가 벌써 20번째라고 한다.

주민들은 효사랑 한마음 주민잔치가 어르신을 공경하고 주민 상호간 화합과 소통을 다지는 축제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말한다. 잔치와 더불어 앞으로도 석천마을을 더욱 살기 좋은 행복마을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한다.

석천마을 주민들의 효심과 끈끈한 정, 그리고 가족처럼 서로 위하는 마음이 담긴 행사가 또 있다. 바로 어르신 효도관광. 주민들은 해마다 마을 어르신들을 모시고 효도 관광을 떠난다. 마을 발전을 위해 한평생 고생하신 어르신들을 위해 주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매년 관광을 준비하고 있다. 이렇게 석천마을 주민들은 어르신들을 내 부모님처럼 모시며 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 /최지영 자유기고가·여수=김진선 기자

/사진=김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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