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3일(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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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esse)’
진점옥
진도경찰서장

  • 입력날짜 : 2019. 09.23. 18:12
프랑스 북부의 칼레(Calais)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두고 영국을 마주보고 있는 작은 항구도시다.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백년전쟁(1337-1453년) 중에도 영국의 집중공격을 받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칼레에는 세계적인 미술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칼레 시청에 전시돼 있는 로댕 (Auguste Rodin)의 ‘칼레의 시민’이란 조각인데, 6명이 목에 밧줄을 감고 칼레시의 열쇠를 들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조각품이 칼레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의 긍지이기도 하는 이유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esse)’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칼레시는 영국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칼레는 시민군을 조직하여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영국군은 칼레를 우회하여 프랑스 본토를 공략했고, 전쟁 막바지에 칼레를 봉쇄했다. 굶주림 속에 1년을 저항했지만 결국 백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자신들을 괴롭힌 칼레의 모든 시민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칼레시 항복사절은 최악의 상황만은 면하기 위해 영국 왕에게 자비를 구했다. 이윽고 에드워드 3세는 다른 항복조건을 내 놓았다. “좋다. 시민들 중 6명을 뽑아 와라! 칼레시민 전체를 대신해서 처형하겠다” 모든 시민들은 안도했으나 다른 한편으론 교수대에 오를 대표 6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칼레에서 제일 부자인 ‘외스타슈드 생 피에르’가 선뜻 죽음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러자 시장인 ‘장데르’가 따라 나섰다. 이에 부자 상인인 ‘피에르 드 위쌍’이 나서고 그의 아들마저 아버지를 따르겠다며 나서니, 이에 감격한 시민 3명이 나타나 한 명이 많은 7명이 되었다. 외스타슈드는 제비를 뽑으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라기 때문에 내일 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안했다. 다음날 아침 6명이 처형장에 모였을 때, 외스타슈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외스타슈드는 이미 시체로 변해있었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살아남으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자신이 먼저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나머지 6명은 영국왕의 명령대로 목에 밧줄을 걸고 맨발에 홑옷만 걸친 채 교수대로 향했다. 그러나 임신 중이던 영국 왕의 아내 필리파가 이들을 처형한다면 임신 중인 아이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왕을 설득했다. 처형은 미뤄졌고 6명의 영웅들은 풀려나게 되었다. 이들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인해 모든 칼레의 시민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었던 것이다. 몇 백년이 지나서 칼레시는 이 영웅적 인물들을 기념하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로댕에게 작품 제작을 의뢰했다. 10년의 작업 끝에 1889년 가을, 마침내 근대 조각의 거장 로댕의 걸작 ‘칼레의 시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소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지만 칼레의 전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일깨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 사례로 꼽히기 때문이다.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처한 안팎의 사정은 녹록치 않다. 작금의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려면 100년 전 한반도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국민 모두가 깨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이 지도층의 솔선수범과 희생정신이다. 우리가 자긍심을 갖는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이 특권을 누리는 수단이 아니라, 그에 상응한 도덕적 의무가 사회적 규범으로 정착되는 사회가 되어야 만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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