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1일(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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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밖 화가들]예술과 돈, 경계에 선 화가 카미유 피사로
무한한 자연의 색으로 삶의 풍경 담아낸 ‘인상주의 아버지’

  • 입력날짜 : 2019. 10.10. 18:09
‘몽마르트의 비오는 오후’ 1987
일흔 셋, 하얀 수염은 덥수룩하게 목 아래까지 내려왔고, 조금은 야윈 얼굴에 눈동자는 흐릿하다. 그래도 붓을 쥔 손의 힘은 버틸만한지 그림을 그리기엔 무리가 없었다. 손아귀의 힘이야 젊은 시절만 못하지만, 많은 세월 버텨온 시간의 무게는 손끝의 노련함이 돼 그림은 더욱 묵직한 기운을 담아낸다. 아마 자신에게도 곧 다가올지 모르는 세상과의 작별. 안경 너머 희미하게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피사로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먼 곳을 응시한다. 아직 그림을 더 그려야 할텐데…. 하는 아쉬움 가득한 마음이 느껴진다. 그가 바라본 것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아닌 그 뒤로 펼쳐진 삶의 풍경들이 아니었을까.

피사로는 줄곧 풍경을 그렸다. 그토록 사랑했던 자연의 풍경, 그리고 그 모든 삶의 풍경까지도 모두 자신의 그림 안에 담았다.

피사로의 마지막 자화상이 그려진 후 2달 남짓한 시간이 지나고, 1903년 11월13일 결국 삶의 시간과 작별했다. 그의 나이 73세, 전립선에 생긴 종기로 고생하던 게 패혈증으로 번져 몸의 상태는 더 악화됐고 결국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 짧지만은 않은 인생항로다. 고생스러웠던 날도 있었지만, 그토록 간절했던 그림은 어떻게든 지속할 수 있었다. 부모님의 믿음도, 아내의 믿음도, 또 화가가 된 아들도 그리고 같이 예술을 논할 수 있었던 동료들이 있었기에 화가로서의 삶은 충분히 만족할 만 했으리라. 그릴 수 있었고, 고뇌할 수 있었고, 도전할 수 있었던, 더 정진할 수 있었던 삶의 여정이었으리라.
‘에라니에서 건초수확’ 1901

피사로는 미술에 대한 열망을 이해해 준 아버지의 지원으로 에꼴 데 보자르에서 수학하고, 살롱전에서 입상해 화가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859년, 스물 아홉의 나이에 살롱전에 데뷔할 수 있었고, 이후로도 도전과 실패는 반복됐다. 당시 프랑스는 잇따른 혁명과 전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고, 피사로도 보불전쟁을 피해 잠시 영국에 머물렀다. 다시 프랑스로 돌아갔을 땐 그의 집에 두고 온 작품 중 대략 1천500여점이 약탈당했고, 더 이상 파리의 중심가에는 살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가 됐다.

영국에 머무르며 봤던 컨스터블과 터너의 그림, 그리고 모네와의 만남으로 자연풍경을 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파리 도심에서 시골로 거처를 옮기고 아름다운 자연의 색을 담아가기 시작했다.

가난한 화가의 삶이었지만 그림에 대한 열망만은 여느 작가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가 선택한 곳은 퐁투아즈로, 10여년간 머물며 많은 화가들과 교우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또 훗날 인상파 화가들을 발굴하고 키워낸 화상 뒤랑 뤼엘과의 만남도 피사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다.

피사로는 세잔, 모네, 기요맹 등 젊은 작가들과 함께 교류하며 기존 관습에 의한 그림보다는 진취적이고 독자적 작품세계를 추구해가고자 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함께 새롭게 구상한 전시, ‘화가, 조각가, 판화가의 협동조합’이라는 명칭 아래 열린 독립적 전시, 바로 인상주의의 첫 번째 전시이다.
‘자화상’ 1903

피사로는 적극 참여했지만 그때부터 험난한 길의 시작이었다. 안경에 때가 묻어 지저분한 그림이라고까지 하는 등 혹평이 쏟아졌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1회 인상주의전 참가 이후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부유한 친구들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아내 줄리였다. 피사로의 집은 늘 다른 화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같이 인상주의전시에 참가했던 화가들보다 5-10살 연상이기도 했으며, 실제 이들에게 따뜻한 조언도 아낌없었다. 세잔은 피사로를 만나기 위해 3㎞에 달하는 거리를 하루가 멀다 하고 오갔으며, 고갱도 피사로에게 그림을 배우고 인상주의 전시에 참여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주변 동료화가들을 도우며 그들이 자신만의 그림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나, 정작 자신 스스로에게는 냉혹했다.

인상주의를 이야기할 때 주요 작가로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을 꼽으며 그 다음으로 피사로의 이름이 회자되는 것도 그러할 터, 피사로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100% 만족하지 못했다. 모네와 르누아르의 개인전 이후에 자신의 개인전이 개최됐을 때에도 “나의 작품은 슬프고 덤덤하고 아무 광택이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며 우려를 했다. 겸손과 불안함 사이에서도 피사로의 열정은 멈추지 않았다.

55살의 피사로는 새로운 도전을 했다. 폴 시냑을 만나고, 또 시냑은 피사로에게 쇠라를 소개했다. 바로 신인상주의와의 만남이었다. 불확실함과 회의감에 젖어있던 자신의 그림세계에 점묘법을 도입하며 변화를 모색했다.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 이후로 12년의 시간이 지났고, 1886년 열렸던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는 고갱과 쇠라, 르동 등을 비롯 17명의 화가가 참여했다. 피사로는 점묘법으로 그린 약 20점의 다양한 작품을 출품했다.

화가이고 가장이었던 그에게 쉽지 않은 선택이었겠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를 확고히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신인상주의의 그림에 반발하고, 그의 작품을 많이 판매해주던 뒤랑 뤼엘까지도 거절했다. 점묘주의 화가들을 따로 전시한다는 조건 하에 인상주의 마지막 전시는 열리게 됐다.

우여곡절 끝 열리게 된 전시처럼, 피사로의 화풍변화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는 혹독한 오판이었다. 생계는 더욱 벼랑 끝으로 몰렸고, 여섯 아이를 부양해야 했던 아내는 가난을 견디지 못해 아이들과 함께 강물에 뛰어들 생각까지도 했었다.

1885-1889년까지 줄곧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을 고집했지만, 결국 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본래의 그림으로 돌아오게 된다.

말년의 피사로는 여전히 자연의 무한한 색들을 끝없이 탐닉했다. 자연의 풍경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끝없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를 막는 것은 단 하나, 건강이었다. 예순이 가까워지며 시작된 안질은 계속 피사로를 괴롭혔다.
문희영
<예술공간 집 관장>

야외작업이 아닌 실내에서 밖을 내려다보며 파리 도심 풍경을 그렸다. 인상주의 전시는 더 이상 열리지 않았지만, 많은 화상들에게 인상주의 그림은 주요 거래작으로 인정받아갔다. 함께 예술을 논하던 마네, 시슬레 등 여러 화가들도 세상을 떠나고 없었지만, 인상주의 그림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 피사로의 뉴욕 전시도 성황을 이뤘다. 예술과 삶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줄타기하던 삶은 지난 이야기가 됐지만, 정작 자신의 몸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 작가들에게 아버지같은 존재로, 다른 모든 화가들을 천천히 격려하고 함께 나아가게 만드는 그런 존재였던 피사로. 그는 여덟 번에 걸친 인상주의 전시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작가로 꾸준한 활동을 지속했으며, 스스로 한계에 다다랐을 때, 과감하게 젊은 작가들의 변화를 수용하는 포용력도 있었다.

그의 집은 늘 동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세잔, 고갱, 고흐 등 인상주의 이후 수많은 작가들에게도 듬직한 버팀목이었다. 피사로라는 한 인간의 큰 마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많은 아름다운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초라한 장소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것이다!” - 카미유 피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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