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5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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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이름으로 세상에 고하다]‘나미야 비밀우체국’에 날아온 사랑에 대한 마음편지
‘사랑엔 정답없다’…사람과 사랑의 다양성 존중해야

  • 입력날짜 : 2019. 10.30. 17:52
‘나미야 비밀우체국’에는 다양한 사연들이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애와 결혼에 대한, 그러니까 사랑에 대한 사연이 많이 들어온다.

사연의 계층으로 보자면 10대, 20대, 30대가 주를 이룬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여태까지 마주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와 조우한다는 말이다.

그 세계는 지금까지 내가 알던 세계와는 다르며 낯설다. 외면하고 싶어도 인간인 이상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중력이 우리를 잡아당기듯 타인이라는 세계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연자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과 관련된 사연편지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분류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연애 사연으로는 짝사랑에 대한 ‘베르테르 형’, 떨어져 지내는 것이 걱정인 ‘견우직녀 형’,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바보온달 형’이 주를 이룬다. 결혼 사연으로는 이 사람과 결혼해도 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할까? 말까? 형’이 대부분이다.

먼저 연애 사연부터 이야기하자면 어떤 유형이든 관계형성 또는 소통의 문제를 안고 있다.

‘베르테르 형’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필자는 답장에 상대방과 우선 친해지라고 쓴다. 인터넷에 떠도는 연애 실패 모음인 일명 ‘야카오톡(이성에게 카톡으로 작업을 걸다가 무참하게 까인 카카오톡 대화 기록의 총칭)’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계속해서 톡을 걸거나 대뜸 약속을 잡고자한다.

상대방과의 관계가 쌓이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행동은 ‘거부’라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당신이 누군지도 자세히 모르는데 갑자기 관계의 여러 단계를 건너뛰는 행동을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다. 물론 이는 일반론일 뿐이다. 사랑의 예측불가능성은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문득 청년세대의 사랑이 빠르게 타오르고 빠르게 식는 것은 충분히 서로를 확인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아닌 ‘일단 사귐’이 우선시 돼서는 안된다.

‘견우직녀 형’의 경우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것이다.

이들이 견우, 직녀가 되는 이유는 군대, 학업, 취직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이유의 배경에는 사회적 분위기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군대는 한국인의 의무이기에 어쩔 수 없지만 학업의 경우는 스펙 업 혹은 해외 취업을 위한 유학으로 인해 떨어지게 되고 취직 경우에는 취업을 위해 서울로 떠나서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플의 마음에는 “떨어져 있는 동안 상대방에게 신경 쓸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작용한다. 그러니 고민하는 것이다. 헤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계속 만나야 하는가? 필자는 이러한 사연에 대한 답장으로 계속 만남을 지속하다 상대방이 없어도 아무렇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헤어지라고 답했다.

더 이상 상대방이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라면 상대 또한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멀리 있는 사랑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그저 사연자가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위와 같은 답장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보온달’ 형의 사연들을 읽노라면 무언가 씁쓸하다.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말 중에 ‘사랑의 본질은 파괴’라는 말이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아래 만나게 되는 타인이라는 세계는 모두 드러난 것이 아닌 미지로 가득 차 있다. 상대방과 만나갈수록 몰랐던 세계가 나타나고 우리는 그것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적응은 내가 바뀌던가 혹은 상대방을 바뀌던가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씁쓸해지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는 자신보다는 상대방이 바뀌기를 원한다. 나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관점과 기준을 상대의 세계에 주입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치약을 “위에서 짜야하는가? 아래에서 짜야하는가?” 같이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삶의 방식’과 ‘가치의 척도’처럼 개인의 가치관까지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좋은쪽이든 나쁜쪽이든 우리는 더 이상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랑의 본질은 파괴인 것이다.

여튼 결론은 이렇다. 나는 답장에 상대가 변하기보다는 자신이 변하는 것이 쉽다고 쓴다. 만약 자신이 변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그저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그것이 안된다면 헤어지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사랑하기 위해 만나는 것이지 스트레스를 받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혼 ‘할까? 말까?’형의 사연을 보면 대체로 “내가 이 사람과 평생 살 수 있을까요?”다. 짐작컨대 이러한 질문의 배경에는 “이 사람 말고는 정말 대안이 없는 것인가?”라는 일말의 의심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삶의 다양성은 이전보다 확연히 늘어났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충족한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결혼이 자신의 명확한 의사보다는 사회적 분위기, 타인에 대한 부러움, 집안의 압박 등에 의해서 이뤄질수도 있기에 자신의 결정에 확신이 들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사랑하고 있더라도 결혼에 대해서는 확신이 안들 수도 있다. 엄연히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 연애가 서로의 세계를 탐구하는 시기라면 결혼은 두 세계가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답장에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확신을 명확히 정의하라고 썼다. 확신은 직접적으로 체감했을 때 온다. 자신의 어떤 이유로 확신을 가지는지 명확히 정의한다면 상대에게서 확신을 느끼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닌 주도적으로 확신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과연 사랑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다만 3자의 시선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지금 나와 같은 청년세대의 속성 중에 하나는 사람을 사귈 때도 가성비를 따진다는 것이다.
박준성
<청년문화허브 간사>

이른바 ‘인(人)코노미스트’다. 인간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혼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비교하고, 감정 소모를 줄이기 위해 행동하는 양식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또한 설렘은 느끼고 싶지만 얽매이는 건 버거워하기에 ‘러브 앤 라이프 밸런스’(러라밸)를 중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사랑은 무엇일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너무 단편적이다.

사회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들 또한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위와 같은 행동양식을 보여주는 것은 머릿속에 이미지로 박힌 사랑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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