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4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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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보는 명화이야기]가족-이중섭의 그림 그리고 가족
말로 다 표현 못할 사랑…늘 그리운 그 이름 ‘가족’

  • 입력날짜 : 2020. 05.07. 17:15
이중섭 作 ‘두 아이’(사진 위)와 ‘서귀포의 환상’(사진 아래 왼쪽) ‘그리운 제주도 풍경’(사진 아래 오른쪽) <위키피디아 검색>

만연한 봄 가운데 위치한 5월은 ‘가정의 달’이라 불릴 만큼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과 관련된 행사로 가득 차 있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약간의 제약이 있긴 하지만,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는 부모님과 부모님께 드릴 카네이션을 준비하는 자녀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달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형성된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이자, 생활을 함께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인 ‘가족’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모습이 조금씩 변형돼 오고 있다. 따라서 현재는 피를 나눈 기본적인 형태 이외에도 입양이나 다문화 등을 통해 구성된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혈연관계가 대다수인 가족 형태가 그렇듯 스스로가 가족 구성원을 ‘선택할 권리’는 갖기가 어렵다. 그렇기에 운명과도 같은 이 관계가 갖는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근래에는 이 끈끈한 가족에 대한 의미가 많이 축소되거나 퇴색돼 가고 있는 상황이다. 생활에 바빠서 혹은 개인주의적인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 단촐해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 상황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렇기에 이런 특별한 달을 맞아서라도 가족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일이 참 중요한 때인 것 같다.


5월을 맞아 가족의 의미가 담긴 명화로 소개할 작품은 국민화가라 불리는 대향(大鄕) 이중섭 (1916-1956)의 작품들이다.

가족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득 담긴 작품들을 살펴보며 가족이라는 따뜻한 의미를 함께 상기시켜 보도록 하자.

화가 이중섭에 대해 떠올릴 때면 대부분이 강렬한 ‘황소’ 그림을 생각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업시간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던 그의 작품들이 민족적인 의지를 나타내주는 활기찬 황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살펴본 이라면 가족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는 그림이 황소 못지않게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역시 이중섭의 가족에 대한 작품을 접할 수 있던 것은 미대 입시를 위한 면접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면접을 위해 이것저것 살피던 중 우연히 보게 된 그의 평전 속 그림들도 물론 좋았지만 따뜻한 그의 마음이 묻어나던 가족에 관한 편지와 그림들이 더욱 기억에 남았다.

덕분에 좋아하는 화가에 대해 말해보라던 면접관의 질문에도 적절히 답변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으로 보면 북한에 위치한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부유한 농민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던 이중섭은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였고, 민족사학인 오산학교에서 수학한 뒤 일본 동경문화학원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이어가게 된다. 비록 동경에서 미술공부를 했지만 오산학교 등에서 배운 ‘조선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그림 속에 녹여내며 그림에 우리의 정서를 담아낼 줄 아는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후에 부인이 될 마사코(남덕) 여사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국적이 달라 우여곡절이 많았던 둘의 사랑은 결혼을 통해서 결실을 맺을 수가 있었다.

당시는 해방 직후로 공산주의가 북한에 퍼져가고 있는 시기였다. 그로 인해 대지주였던 이중섭의 집안은 규탄을 받아 기울게 됐고, 거기에 일본인 아내를 가졌다는 낙인마저 찍혀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돼버렸다.

결혼 후 5년이 지나자 6·25 전쟁이 시작됐고,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이중섭은 1950년 12월경 전쟁을 피해 아내 마사코와 두 아들을 데리고 아래로 아래로 피난을 시작했다.

전쟁 통에 예술가가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가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피난민들로 발 디딜 곳 없는 수용소와 너무나 역부족인 배급은 그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었고, 하는 수 없이 북적대는 부산을 떠나 제주에 가기로 마음먹는다.

희망을 가지고 도착한 제주도의 삶 역시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먹을 것을 찾아 수시로 바다에 나가야 했고, 게를 잡아 삶아 먹어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이중섭은 제주도에서의 1년이 가족과 보낸 시간 중에 가장 황금기였다고 했다.

부족한 먹거리에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너른 바다와 고요한 일상, 그리고 매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그렇게 행복한 순간이었나 보다.

이 시기 그려진 작품들만 해도 20점이 넘었으며 그림 속에는 행복했던 그의 감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알알이 담겨있다.

‘서귀포의 환상’(1951)이라는 작품은 제주 생활을 도와준 이에게 이중섭이 답례로 그려준 작품이다. 화가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나무판에 그려진 이 작품은 크기가 90㎝에 달하는데, 전쟁 당시라 생활용품을 활용해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나무에 주렁주렁 달린 귤들은 제주도 생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환상의 섬 제주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자유롭게 표현돼 있다.

특히나 한가운데 갈매기를 타고 나르는 아이의 모습은 신비로운 느낌마저 선사한다.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던 시기라서 그런지 몰라도 동심의 세계에 온 마냥 밝고 풍요로운 느낌이 느껴진다. 그러나 실상 이중섭과 가족들은 ‘그리운 제주도 풍경’이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커다란 솥처럼 생긴 구멍에서 연신 게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두 아이의 모습처럼 가난하기 이를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림 아래서 그런 아이들을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는 부모의 표정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담겨있다.

행복함도 잠시, 이중섭은 지독한 생활고에 결국 가족을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 남아 어떻게 해서든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부산으로 옮겨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가족과 재회하지 못하고 40대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이 시기 많이 그려졌던 그림들이 바로 ‘은지화’다. 담뱃갑 속 은박지를 편 뒤 그 위에 연필 등 예리한 것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가끔 채색을 해가며 완성시킨 그림이었다. 은박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이중섭이 어린 시절부터였다.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리고 스케치하던 것에서 나중에는 가난 때문에 종이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점점 많은 양을 차지하게 됐던 것이다. 작품 ‘두 아이’에서 꼭 껴안은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롭게 보인다. 이 은지화 이외에도 일본의 가족들과 주고받았던 그림과 편지들에는 애절한 그리움이 한가득 담겨있다.

이현남
<전남대 미술이론 박사 수료>
“건강히 잘 지내고 있지? 아빠는 오늘 종이가 떨어져서 한 장만 그려 보낸다. 태성 태현 둘이서 사이좋게 보렴. 다음에는 재미있는 그림 한 장씩 그려서 편지와 함께 보내줄게. 태현 군, 태성 군. 둘이서 사이좋게 기다려다오. 아빠가 가서 자전거 사줄게.”

우리에게는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각인된 화가 이중섭에게 가족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거창한 수식어보다는 그저 가족을 사랑했던 따뜻한 가장의 모습이 묻어날 뿐이다.

이처럼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 중에 가족과의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의 따뜻한 마음처럼 이번엔 꼭 용기 내어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꼬옥 안아드려 보는 것은 어떨까? 아마 100마디 말과 거창한 선물보다 훨씬 더 좋은 효도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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