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6일(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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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숙의 시소게임 / 천세진

  • 입력날짜 : 2021. 01.24. 18:21
천세진 문화비평가·시인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와 ‘카페 벨 에포크’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대중은 프랑스 파리의 황금기라는 ‘벨 에포크(1890-1914년)’를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던 시절’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 같다. 그 시기가 현대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인상주의의 절정기와 겹치기 때문에 영화뿐만 아니라, 미술 분야 책들도 그런 이해의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몇 년 째 벨 에포크에 대해 집중하면서, 낭만적인 모습과는 다른 풍경들을 자주 만났다. 그 풍경들은 낯선 것이 아니었고, 벨 에포크 이전 시대나 이후 시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풍경이었다. 기술문명의 외피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풍경처럼 보였을 뿐이다. 서로 다른 풍경들이 갖고 있는 본질적 속성들이 이해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25년의 기간을 ‘벨 에포크’란 이름으로 구분해 부르는 게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깨달음은 과거의 특정 시간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우리를 맹목(盲目)으로 만들 위험이 아주 크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좋은’ 모습만을 가진 게 아니었다. 왕족과 귀족들로 상징되는 구체제는 퇴폐에 병들어 있었고, 신체제를 상징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아직 세계를 이끌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대다수 민중들은 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굶주리고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던 문제투성이의 시대였다.

슈테판 츠바이크(1881-1942)는 ‘어제의 세계’에서 자신이 겪은 시대를 이렇게 말했다. “열정적으로 일한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세계에 올바른 것, 세상을 구제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는 착각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이러한 문학적인 표명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그 독자적인 악의 길을 걸어갔다” 그의 말은 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적용돼야 하고, 착각의 시대에는 벨 에포크도 포함되어야 한다. 낭만적이고 성숙한 시대라고 생각한 벨 에포크는 어쩌면 ‘철딱서니 없이 자기도취의 과잉상태에 있었던 미숙아들’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을 미성숙한 상태에서 원숙한 상태로 나아가는 존재로 생각하고, 문화도 그런 궤적을 따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문화는 성숙과 미성숙을 반복한다. 그런 견해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갈등들은 ‘성숙과 미성숙 간의 충돌’이고, 충돌의 끝은 성숙이 미성숙에게 승리하는 풍경으로 끝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만나는 가장 낯익은 풍경은 ‘미성숙과 미성숙’의 충돌이고, 어느 한쪽의 승리로 끝나지 않는 ‘미성숙 간의 시소게임’의 고통스러운 지속이다. 특히 정치계를 보면 그런 확신이 든다. 어쩌면 성숙했다고 믿는 한때의 시기조차 착각이고, 서로 다른 미성숙이 혼재되어 씨름하고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세계사를 훑어보면 매번의 위기마다 인간은 천사와 악마, 왜소함과 거대함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겨우겨우 성숙시킨 문화적 근원을 스스로 송두리째 짓밟는 미성숙의 극치를 선보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벨 에포크의 뒤를 이은 1·2차 세계대전이었다.

현대로 눈을 돌려도 증거는 발견된다. 재임 중 2차례나 하원으로부터 탄핵을 당한 트럼프는 무엇을 보여주었을까? 5년 전 트럼프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고 입을 놀리기 시작했을 때, 공영방송에 출연한 어느 유학파 여성 정치학자는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 방송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똑똑한 어느 미국인 청년도, 트럼프 같은 인물이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은 미국이 자유롭다는 증거이지만, 해프닝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의 모습은 해프닝이 아니라, 미국 주류의 절반이 배타적이고 편협한 생각을 지지한다는 ‘미성숙’의 확인이었다.

우리는 ‘위기’를 현재 겪고 있는 코로나처럼 이겨내야 할, 없애야 할 재난의 문제로 인식한다. 마치 갑자기 발생한 단발적인 지진처럼.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위기의 와중에 있었고, 생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이전과 다른 탈을 쓰고 계속해서 찾아온다. 그 대면에서 우리가 편안해지려면 지성적으로 성숙해져야 한다. 정치는 당대인의 거울이다. 지금 그 거울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현명함과는 무관한 모습이 비치고 있다. 그런데 거울 속 정치의 뒤에는 우리의 모습도 있다. 이상하게도 정치와 우리가 가족인 듯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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